[정정보도] 문향강릉, 허균 탄생시킨 ‘애일당’ 복원 가능한가교산 허균의 생가·난설헌 허초희의 문학적 모태 “애일당” 사라진 후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에는 허난설헌과 허균의 외조부인 김광철이 그의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교산 자락의 명당 터에 지은 집인 ‘애일당’이 있었다.
김광철은 조선시대 문인으로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대문장가인 허엽의 장인이다. 이 애일당은 허엽의 아들 허균이 태어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강릉에서 오직 하나뿐인 허균·난설헌 기념사업회에서 허균과 허난설헌을 선양하는 사업을 하고는 있지만, 이 ‘애일당’이 사라진 후 지금까지 복원이 되지 않고 있어 이를 안타깝게 여긴 몇몇 학자들의 제보로 본 기자는 주변에서 구할 수 있었던 관련 문헌들을 참고로 ‘애일당’이 가진 가치와 복원의 효용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로 2022년 9월 23일자 기사 [문향강릉, 허균·허초희 탄생시킨 ‘애일당’ 사라져]라는 제목의 기사를 낸 바가 있다.
이에 약 2년이 흐른 뒤인 2024년 8월 13일, 양천허씨강릉종중 허세광 회장으로부터 애일당의 좀 더 정확한 위치와 복원에 대한 그간의 노력과 어려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본지는 첫 기사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설명과 잘못된 내용에 대한 수정을 비롯해 다시금 문향강릉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허균과 허초희의 문학적 배경이 되어준 ‘애일당’ 복원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염원의 성취를 위해 첫 기사를 바탕으로 두 번째 기사를 작성하게 됐음을 밝힌다.
먼저 기사 제목인 [문향강릉, 허균·허초희 탄생시킨 ‘애일당’ 사라져]에서 허균은 애일당에서 태어났지만, 허초희는 그렇지 않음에도 제목에 마치 허초희도 애일당에서 태어난 듯 표현된 것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이것은 허균의 글뿐만이 아니라 허초희의 글에서도 바다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부분을 두고 허균과 허초희 모두 애일당이 있는 외가를 방문했을 때 바닷가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음을 유추하여 ‘문학적 탄생’을 의미하는 문구로, 본 기사의 중간 부분에 허균이 애일당에서 태어났다는 내용만 실었음을 통해 이해되길 기대한다.
허세광 회장은 애일당이 있던 허균이 태어난 외가집의 주소가 토지지번으로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162번지임을 밝혔다.
또한 허세광 회장은 “저의 선친과 주문진읍장을 지낸 허린(초당공의 12세손)이 매수하려고 했으나 당시 소유자 김유진씨(작고)가 매도할 의향이 없어 매수를 못했다.
그 후 1983년 8월 12일 연세대학교 김동욱 박사, 이숭녕 박사 외 전국시가비동호회원 주관으로 교산 시비 건립을 추진하게 됐다. 문중에서 현재 교산 시비가 있는 자리가 애일당 루(樓)가 있었다며 산 32번지를 매입해 교산 시비를 세웠다.
교산 시비가 있는 산32번지를 비롯하여 애일당터 159-1, 161, 162, 159-3, 5, 160, 일대가 애일당 소유토지였는데, 최명희 전 강릉시장이 일대를 매수·복원하여 교산공과 난설헌 행사를 각각 확대하려고 했으나, 땅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가격도 오르고 시장도 바뀌면서 지금에 이르러 현실적으로 종중이나 지자체에서 매수하여 유적지화 하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음은 본지의 첫 기사의 내용을 지금에 맞게 수정하여 다시 수록한 내용이다.
『강릉의 관련 학자들은 지방화 시대가 된 후 지역마다 경쟁하듯 ‘없는 문화재’도 만들고, 이웃 지역 간에 소위 ‘문화재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요즘,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강릉의 두 문인을 선양하기 위해 소실된 문화재 하나라도 복원하는 것은 지역 문화관광의 활성화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난설헌 허초희(1563~1589)를 기념하는 추모제가 매년 강릉 초당의 허균·난설헌 기념공원 내 난설헌 생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추모제에 참석한 문인들은 난설헌의 작품들을 통해 450여 년 전 그녀의 삶에 대한 애환을 고스란히 마음 깊이 공감하며 난설헌의 혼을 위로한다.
강릉의 문인들은 누구보다도 난설헌의 유작들을 흠모하며 그들의 선양을 위해 아낌없는 열정과 실천적 노력으로 국내·외적 위상을 높이고 세계적으로 선양하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난설헌은 한.중.일 동양 삼국 최고의 천재 시인으로 그 가치를 일찍이 인정받아 국가적으로 보존과 선양의 가치가 매우 큰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으며,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작가로 유명한 동생 허균(1569~1618) 역시 마찬가지다.
문향 강릉의 자랑이며 자존심인 난설헌 허초희와 교산 허균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과 작품의 근간이 되는 출생과 성장기의 자연적·인적 배경을 살펴보게 된다.
강릉 출신의 신봉승 작가는 그의 저서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에서 ‘난설헌이 강원도 강릉의 초당동에서 허엽의 셋째 따님으로 태어난 (1563 : 명종 9년) 것은 거기에 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외조부 김광철은 학문이 깊고 풍류를 아는 예조참판(요즘으로 말하면 교육부 차관)이었다
그는 지금의 강릉시 사천면에 있는 모기재(교산蛟山)에 '애일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바다를 벗하며 동해안의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볼 만큼 자연과 낭만을 사랑하는 선비였다.
먼저 태어난 난설헌이 그랬던 것처럼 교산 허균도 외조부의 무릎에서 자연을 사랑하는 낭만을 몸에 익히면서 자랐다.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자신의 호를 초당(草堂)이라고 한 것은 장인(처가)의 고장을 따서 지은 것이 아닌가 싶고, 허균의 호를 ‘교산(蛟山)’이라고 한 것은 외조부의 정자인 애일당이 있는 ‘모기재’에서 연유된 것이라라면 그 고장의 풍광이 수려한 탓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그 고장의 생기와 숨결을 간직하려 했음일 것이다.’라고 적었다.
유불선(儒佛仙)에 통달하였다고 평가받을 만큼 지고한 학문을 갖추었던 교산 허균이 자신의 소설 『홍길동전』을 당시 양반 지식인층의 글인 한자가 아닌 백성들의 글로 언문이라고 낮추어 불리던 한글로 완성했다는 점은 그의 잠재적으로 내재 된 평등사상과 용기의 발로가 아닐까.
특히 그가 서울 본가에서 만난 이달은 학문과 글재주가 뛰어나지만 서자이기 때문에 관직에 나갈 수 없었던 훌륭한 스승이었는데, 허균은 그에게서 학문적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라 불평등의 불합리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된 때문이다.
또한 근본적으로 그의 유년 시절을 강릉 사천 바닷가에 자리하여 창문을 열면 바로 눈앞에 동해바다가 펼쳐지는 애일당에서 만끽한 거센 파도와 붉은 태양이 주는 초인간적인 자연의 힘을 느끼며, 동무들과 바닷가에서 자유로이 뛰놀던 시절에 형성된 인간 평등의 당연성을 깨달은 때문이 아니겠는가.
허균이 끔직이 여기며 따랐던 누님 난설헌은 여덟 살 어린 나이로 ‘광한전백옥루상량문’과 같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글을 지어 세인을 놀라게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상상의 궁궐인 ‘광한전 백옥루’ 상량식에 자신이 초대받은 것으로 상상하여 상량문을 지었다.
그 시 중에,
“어영차! 동쪽으로 대들보를 올리세
새벽에 봉황타고 용궁에 들어가 날이 밝자 해가
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일만 가락 붉은 노을 바다에 비치도다
--------중간 생략------
어영차! 북쪽으로 대들보를 올리세
북해는 아득하고 아득해 북극성에 젖어드는데
봉새가 날개 하늘 치니 그 바람 그 힘으로 물결이 높이 치솟아
구만리 하늘에 구름 드리워 비의 기운이 어둑하다.”
에서도‘교산과 난설헌의 문학세계의 공통점인 선경(仙境)의 세계는 그 들이 나고 자란 외가 애일당 창을 통해 들어오는 동틀 녘 동해 바다의 경이로운 비경의 세계와 무관하지 않음을 그녀의 작품 ‘꿈에 노닐던 광상산의 노래’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교산 허균은 자신과 생모의 고향이며 외조부가 아끼던 사천 애일당을 사랑했으며, 「엄처사전」에서는 강릉 우계현에 살았던 엄충정을 주인공으로 다룰 정도로 강릉에 애착을 보였다.
강릉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 불여세합(不與世合)의 풍운아, 초월한 사상의 선구자인 교산 허균이 강릉에 대한 애정으로 강릉의 인물, 명소, 명물, 풍속, 설화, 문화유산 등 강릉문화의 전반에 대하여는 1593년 허균이 당대 시를 평가한 평론집인 「학산초담」, 1611년 편찬한 야사집인 「성옹지소록」, 시문집으로 ‘연화 부인 설화’가 기록되어 있기도 한 「성소부부고」와 그 안에 실려있는 「엄처사전」 등에 다양하고 자세하게 논평하고 있다.
특히 「성소부부고, 문부 4, 애일당기」에는 교산과 애일당의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강릉부에서 30리 되는 곳에 사촌(沙村)이 있는데, 동쪽으로는 대해에 임했으며 북쪽으로는 오대, 청학, 보현 등 여러 산이 바라보인다.
큰 강 한 줄기가 백병산에서 나와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데, 이 내를 빙둘러 거주하는 이가 상하 수십 리에 거의 수백 가구나 되며, 모두 양쪽 언덕에 의지하여 내에 면해서 문을 내었다.
강의 동쪽 산은 북대로부터 내려와 꾸불꾸불 연속된 것이 용처럼 생겼는데, 바닷가에서 홀연히 솟구쳐 사화산(沙火山)의 수자리가 되었다. 수자리 아래에는 옛날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강이 무너질 때 늙은 교룡(蛟龍)이 그 밑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 교룡이 가정 신유년(1501, 연산군 7년) 가을에 그 바위를 깨뜨리고 떠나는 바람에 두 동강이 나서 구멍이 뚫린 것이 문과 같이 되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교문암(蛟門岩)이라 호칭하였다. 조금 남쪽으로 언덕 하나가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름을 쌍한정(雙閑亭)이라 한다.
----중략---
그 산수의 형세가 울창하고 깊숙하며, 기운이 힘차게 일어나 용솟음치는 까닭에, 그중에서 특이한 인물이 많이 난다.
나의 외조부 참판공께서는 바다에 가장 가까운 땅을 택해 당을 지었다. 새벽에 일어나 창을 젖히면 해돋이를 볼 수 있는데, 공은 마침 모친을 모시고서 희구하는 처지에 있었으므로 애일(愛日: 세월이 가는 것을 애석히 여긴다는 뜻으로 효자가 부모를 오래 모시고 싶어하는 마음을 비유한 말임)로서 이름을 삼았다.
황문 오희맹이 큰 액자를 썼고 태사 공용경이 시를 지어 읊었더니, 일시에 여러 명인들이 화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애일당은 이로 말미암아 강릉에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후 교산은 임진년 가을 어머니를 모시고 왜적을 피해 배로 이곳 애일당에 도착해 거주하게 되었는데, 무너진 담과 문, 잡목이 무성한 마당에 시를 쓴 현판도 반만 남은 모습을 보고 통곡하자, 재빨리 종들을 독촉하여 깨끗이 청소하고 거쳐했다고 한다.
교산은 “아아, 선조께서 힘써 터 닦고 노부모를 모시는 고을 마련하기에 이처럼 부지런했는데, 후손들이 쇠약하여 이 몇 칸의 집도 보호하지 못하고 무너지게 했으니 그 죄가 실로 크다.
나는 비록 불민하나 마침 노모를 모시고 이 당을 이어 지키게 되었으니 그 애일의 생각이 어찌 선조에서 끊이게 하겠는가.
오로지 마음을 다하고 힘을 쏟아 노력하며 정성스레 보전함으로써 어머님의 뜻을 편안케 하고 선조의 터전을 개수하여 한가히 노닐고 편안히 처하여 일생을 마친다면, 그래도 외조부를 구원에서 모시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기록하여 뒷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다.”라고 맺고 있다.
교산은 1569년 이곳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꿈을 키우며 공부하고 임란 뒤 잠시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에서 살면서 외조부의 혼과 교산의 태를 묻은 이곳이 보전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 후 애일당은 강릉 지역민들에게 많은 설화를 남기며, 애일당을 건립한 교산의 외조부 김광철의 아우가 살던 자리인 이설당과 더불어 고장의 명당지로 유명하다.
얼마전 강릉의 모학자는 “전통문향 강릉의 근간을 이루는 교산과 난설헌의 탄생지인 애일당이 얼마 전 흔적 없이 사라지고 덩그러니 그 터 만 남아있게 되었다”라는 제보와 함꼐 헐기 전의 모습이라며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 사진을 본 허씨 문중의 한 후손은 그 사진 속의 집은 100년도 채 안된 건물로 본래의 애일당이 아니라며, 당혹감을 전했다.
두 분의 의견에서 무엇이 맞고 틀리는지를 떠나서 모두 강릉의 전통문화 계승 발전을 위해 “애일당”의 복원을 희망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에 ‘애일당‘ 복원의 타당성을 제기하기 위한 근거를 모색해보았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러 후손들이 지켜오지 못한 아쉬움이 무척 크게 느껴지는 것은 강원도가 특별자치도로 결정됨에 따르는 문화. 역사적으로 사료관과 유적지를 확대하여 경제적 부가가치뿐만이 아니라 다른 도시들이 갖지 못한 강릉만이 가진 높은 문학적 수준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데 중요하다는 여론과 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겠다.
특히 허균의 「홍길동전」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성을 인정받아 문학적 연구가 지속되어 왔으며, 근래에 지역 문화와 관련된 인물 선양의 측면에서 강조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강릉시에서는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허균 사상 계승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허균 사상에 포함된 변화와 개혁의 정신을 지역 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시켜 도민 의식과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며, 지역문화의 이미지를 창조하여 관광객 유치로 이어져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와 후손들이 누리고 있고 누릴 문화적·경제적 부가가치의 확대와 강릉이 가진 국가적, 나아가 세계적으로 소중한 문학적 자료들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은 우리와 우리 후손들을 위한 기본 의무라는 점에서 책임성 있게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강원종합뉴스 영동취재본부 송은조 기자 <저작권자 ⓒ 강원종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송은조 강원영동취재본부(강릉,속초,고성,양양)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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